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문단 편집) ==== 김일성의 생활 미화 ==== * 김일성은 북한 인민과 세계 진보적 인민들의 무한한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는데도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특혜와 [[우상화/북한|특전]]도 허용하지 않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했다. -('''반박''') 오히려 김일성은 생전에 거대한 황금 동상[* 우리가 아는 그 김일성 동상이다. 1972년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37kg(현재 가치로 약 '''29억 2천만 원'''에 달한다)의 금박이 입혀졌으나 1978년 방북한 [[덩샤오핑]]이 이를 보고 "돈 없다면서 왜 이런 데에 쓸 금은 있나?"고 지적하자 당황해서 금박을 떼어낸 것이다. [[https://g-cbox.pstatic.net/MjAyMjA4MTdfNjcg/MDAxNjYwNzI2ODMyMTA0.O8rXuYBbH4rpgtUnTh6FOrklRKdyRBRBTYgYr9BN3_wg.Tst4SG3QSBwqin5XZuTsfItOYJNkzIO4EDgvd3l-2AYg.JPEG/the-gold-leaf-statue-of-kim-il-sung-in-pyongyang-north-korea-1972-E0143Y.jpg|#]]]을 세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초상화에서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나야 한다며 자신의 초상화에 [[향수]]를 뿌리게 하는 등 우상화 과정에서 웬만한 [[사이비 종교]] 교주도 경악할 기행을 저질렀으며,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기는 커녕 오히려 수십 채의 초호화 저택을 가지고 해외 레스토랑에서 훈련받은 요리사들이 만든 요리만 먹었으며, [[마약]]을 밀매한 돈으로 세계에서 최고라는 물건들을 사들여 집에다 보관하고는 17세~20대 초반의 어린 처녀들을 [[기쁨조]]로 부리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 김일성은 한평생 언제나 인민들과 함께 있으며 생활도 인민들과 같이 소박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음식도 인민들이 좋아하는 평범한 음식을 달게 들곤 했다. -('''반박''') 김일성은 김정일보다 소박하게 먹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는 애초에 김정일이 워낙 심각한 [[미식가]]였기에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이는 거지 김일성도 생전에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 김일성은 우리(북한의) 아이들과 인민을 위해서는 [[북한/인권|세상에 없는 특전과 특혜]], [[정치범수용소/북한|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면서도 [[김일성#s-5.1|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불허했다. * 김일성은 1965년 7월 한 공장으로 [[현지지도]]를 갔을 때 협의회를 지도한 후 노동자들이 공장정양소[* 靜養所, 몸과 마음의 안정과 휴양을 위한 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에서 점심식사를 마련했다고 하자 김일성은 모두 같이 가자고 말한 후 어디론가 갔는데, 간 곳은 노동자들의 숙소였고, 숙소에는 김일성이 같이 먹자고 준비해놓은 [[조밥]] 몇 그릇과 오이냉국만이 올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이 식사에 대해 "오늘처럼 더운 날에는 시원한 오이냉국이 그저그만이고 거기에 조밥이 제격이다"라고 말했고, 그날 밤에는 이 일을 상기하며 "[[위선|난 대접놀음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 김일성은 1992년 5월 [[개성]]으로 현지지도를 갔을 때 개성 바로 앞의 풀밭에 앉아서 아침식사를 했으며, "국가주석의 현지지도라고 해서 왕님행차하듯 해서는 안 된다. [[내로남불|옛날에는 시골의 사또만 행차해도 숱한 아전나부랭이들까지 묻어가서 음식상을 차려놓고 진탕망탕 먹고 돌아치며 인민들의 피땀을 빨아내군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민 위에 군림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인민의 심부름꾼이여야 한다.]]"는 교시를 남겼고, 이에 따라 현지지도하는 곳의 일꾼들에게 식은 밥, 콩나물, 도라지무침이 든 간소한 곽밥(도시락)밖에 나누어주지 못했다. 마지막 한 사람이 젓가락을 놓을 때까지 기다린 김일성은 "그럼 시간도 없는데 더운물로 입가심들을 하고 어서 떠나자"고 하며 일어섰다. -('''반박''') 잘 보면 김일성이 아침식사로 먹은 도시락에 무엇이 들었는지가 '''전혀 적혀있지 않다.''' 북한의 김일성 생활 미화 실태로 미루어보면 김일성이 진짜로 소박한 식사를 했으면 김일성이 먹은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묘사하며 김일성의 '검소함'을 찬양했을 텐데 후술하듯 노동자들에게 대접한 음식은 상세히 묘사했으면서 김일성이 무엇을 먹었는지를 전혀 적지 않은 걸 보면 풀밭에 앉아서 먹은 도시락에는 후술할 '캐비아 줴기밥' 같은 초호화 음식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감안하면 김일성은 초호화 도시락을 먹고는 일꾼들에게는 빈약한(?) 음식만 던져둔 꼴이 된다. * 김일성은 5호댁[* 여기서 '5호댁'은 [[보통강]]변에 위치한 김일성의 사저 '제5호 관저'로, 1950년대 후반부터 [[주석궁]]이 완공된 1977년까지 김일성이 살던 곳으로서 [[김정일]]이 젊은 시절을 보내던 곳이다. 2009년 [[평양 10만호 건설사업]] 와중에 김정일이 철거를 지시했으나 10만호 사업의 실패로 흐지부지해지는 듯 싶었다가 2021년 김정은이 헐고 북한 내 최충성층들에게 하사한 호화 주택가 [[경루동]]을 지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091219065600014|#]] 북한의 선전대로라면 이 저택은 '종합농사시험장', '식물연구소', '가금연구소'와도 같았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우리 인민을 남부럽지 않게 잘 입히고 잘 먹이기 위해' 설치한 거라고 선전했지만 이렇게 만든 음식들이 누구의 뱃속으로 들어갔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을 설계할 때 대리석을 쓰거나 수입자재를 쓰면서 장식하는 것을 그만둘 것,[* 문맥상으로도 은근히 부자연스럽고 뜬금없는 것은 물론이고 김일성 별장의 실체를 고려하면 어떻게든 김일성이 실제로는 사치스럽게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애쓰는 흔적이 보인다. 김일성의 별장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김일성#s-5.1|링크]] 참조.] 조선식으로 소박하게 꾸리도록 할 것[* 이것 역시 김일성의 제5호 관저가 실제로는 서양식으로 꾸며졌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는 증거다.]을 지시했고, 이에 설계일끈들은 김일성의 고매한 풍모에 눈시울을 적시며 설계를 다시 하였으나 김일성은 세 차례나 설계를 부결했고, 이에 설계일꾼들은 "이보다 더 소박하게 할수는 없다"고 간절히 말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동무들의 심정은 자신께서도 안다고, 하지만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우리들에게는 크고 화려한 집보다 소박하고 아담한 집이 더 좋다"고 말했고, 이에 설계일꾼들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일성은 인민들 모두가 당의 은덕으로 궁궐 같은 집[* 김일성 시기 노동자와 농민들은 주로 작은 방 한두칸이 달리고 개인 화장실도 없이 공동 화장실밖에 없는 7평짜리 조그만 집에서 살았다. [[https://imnews.imbc.com/replay/unity/4125609_29114.html|#1]] [[https://unikoreablog.tistory.com/1578|#2]] 얼마나 북한에서 악랄하게 착취하고 빈약한 보상으로 '은혜'를 주는 것마냥 세뇌를 시키는지 잘 보여주는 증거인 셈.]을 쓰고 살게 되였다고 고마움의 노래를 부를 때에도 여전히 그 수수한 집에서 평민으로 검박하게 살았다. -('''반박''') 그 '한 나라 주석의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수수한' 저택은 [[https://www.dailynk.com/wp-content/uploads/2023/03/20230322_hya_%EC%A0%95%EC%84%B1%ED%95%99%EC%B9%BC%EB%9F%BC_%EB%B3%B4%ED%86%B5%EA%B0%95%EB%B3%80.jpg|이렇게]] [[https://img6.yna.co.kr/photo/yna/YH/2009/12/20/PYH2009122000230001300_P4.jpg|생겼다.]] 애초에 저렇게 '평민들의 집같이 너무도 작고 소박한' 집을 헌 부지가 800세대 주택단지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넓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북한의 선전은 경루동 철거를 위해 '5호댁'을 철거한 것에 대해 '한 나라 주석의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수수한 5호댁을 혁명사적관으로 꾸려 우리 인민들에게 인민적수령의 고매한 위인상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식으로 포장했지만, 애초에 북한이 지도자가 만진 간장병까지 귀중하게 여기는 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만약 '5호댁'이 김일성의 '소박한' 생활이 드러나는 '유적'이면 앞장서서 '혁명사적지'로서 앞장서 보호했지 그 '유적'을 거리낌 없이(?) 헐어버리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아마 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김일성의 치부, 즉 호화 생활이 '5호댁'에 그대로 드러났기에 '5호댁'을 보존하지 않고 수월하게 철거할 수 있었다는 가설이 유력해 보인다. - 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경루동을 건설하기 위해 '5호댁'을 헐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5호댁'을 헐 무렵부터 갑자기 언급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어떻게든 '5호댁'에 드러난 김일성의 호화 생활을 감추고 마치 검소하게 생활한 것마냥 포장하며 경루동 건설의 '정당성'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날조한 에피소드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 김일성은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 시기까지도 "내가 우리 집을 다시 지으면 우리 인민들의 집을 지을 자재를 더 쓰게 되지 않겠는가"고 말하며 지은 지 오래된 금수산의사당지구[* [[금수산태양궁전]](당시에는 주석궁) 인근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의 [[금수산태양궁전|작고 소박한 저택]]에서 생활했다. -('''반박''') 김일성 생전에 김일성의 거주지이자 집무실로 쓰인 주석궁은 '작기는' 커녕 부지면적은 3.5㎦에 건축면적만 해도 3.5ha에 육박하는 거대한 건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